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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논리적이다. 희대의 사기꾼, 정치인, 종교인, 예술인, 터무니 없는 미신 신봉자도 모두 나름의 논리가 있다.

나는 우리가 각자 만들어낸 다양한 논리를 차용하고 편집해서 새로운 논리를 구성해 낸다."

 

"We are logical. Everyone, including politicians, religious people, artists, and superstitious myths, has its own logic.

I borrow and edit the various logic that we have created and construct a new logic."

​은밀한 침대 속 인간 내면으로의 초대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                                                                                                                                                                                                   

CRITIQUE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기록물과 그 함의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                                                                                                                                                                                                   

신재은 작가는 ‘호황’이라는 현대미술에서 전시 주제로 흔히 다루지 않았던 다소 생소한 제목을 가지고 그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현재 전 세계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팽배해 가고 있는 상황이며, 경제적인 불황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듯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시각은 경제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호황을 염원하고 있고 각 개인들이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잘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가는 사람들의 이러한 심리를 대신하여 거대한 부적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성공, 발전운과 금전운이 있다는 대한민국의 가장 서쪽과 동쪽을 찾아가서 부적을 설치하고 이에 관련한 기록들을 만들어내며 이를 전시장 안으로 가져 온다. 이 나라의 호황을 위한 커다란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실행한 것이다. 작가는 예술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예술과 종교가 분리되기 이전 오늘날 예술가로 불리는 이들은 그 부족의 제사장과 같은 주술가적 위치에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그의 작업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작가는 현재 시점에 어울리고 현대인의 욕망과 염원을 실현할 수 있도록 변형된 주술가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신재은 작가의 작업을 잘 살펴보면 복을 불러올 부적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손 없는 날을 택하여 작업을 하고 풍수에 의한 길흉을 따져서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작가는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보다는 인간이 욕망하는 것과 터부시하는 것 사이의 간극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작업은 단순히 주술가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여 욕망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거나 도덕이나 법률과 같은 사회적 규범을 만들고 일정한 욕망적 행위를 제한하게 되는 사회적 시스템과 심리적 시스템 사이에서 그 저변에 있는 것들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시각은 그의 작업이 불가능을 전제로 한 믿음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작가의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작가는 종교인이나 주술가들 처럼 일정한 믿음 속으로 들어가서 그 신념에 의해 이 일련의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주술행위와 관련한 믿음과는 어느 정도 ‘거리두기’를 하고 인간의 신념과 관련된 사회적 심리적 메커니즘을 살펴보고자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그의 예술 작업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임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거리두기’라는 것의 의미는 작가의 작업 방향을 고려해 볼 때 주술적 행위가 불가능하고 비이성적인 행위임을 증명하거나 이를 비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가능과 가능이라는 선입견이 없이 이성과 비이성, 합리와 비합리 그리고 자연과 초자연의 경계 지점에서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하는 작가의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좋은 꿈을 꾸었을 때 복권을 한번 사보고,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택하여, 집이나 묘의 위치를 신중하게 풍수를 고려하고자 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행위들을 미신이라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붉은 색으로 이름을 쓰기를 회피하거나 건물의 4층을 숫자 4를 그대로 쓰지 않고 F라는 약호로 대체하여 쓰는 것은 마치 상식처럼 되어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미신을 믿지 않지만 왠지 알 수 없는 꺼림직한 느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심리의 저변에 있는 ‘알 수 없는 상태’를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주술가의 위치에서 행위를 하고 이를 기록하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때 작가의 작업은 욕망과 금기라는 인간내부와 인간외부의 두 체계간 충돌지점에서의 일종의 솔루션(solution)으로서의 주술적, 종교적 행위들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이는 작가가 욕망하는 것과 염원하는 것 사이에는 금기 혹은 인간의 한계 지점이 있음을 자각하게 될 때 그 한계지점에서 그 알 수 없는 욕망을 처리하는 방법으로서의 특정한 행위를 하게 되는 인간의 전체 체계에 대해 알아가도록 만들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작가가 전시 주제로 다루고 있는 ‘호황’이라는 것은 분명 물질적이고 가시적이며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결과무과 관련된 부분이지만 이것을 욕망하고 이루려고 하는 인간의 내적 흐름은 물질이나 가시적 세계와 다른 차원에서 합리적 이성의 체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알 수 없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일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작업을 통해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 알 수 없는 영역이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부분 못지않게 더 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작가가 인간의 이성에 포착되지 않는 알 수 없는 영역 자체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과정을 기록해내고 가시화하고자 한 아이디어는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이성적이거나 초자연적인 부분을 예술의 영역 안에서 담론화하고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 있어 보인다.

또한 이와 함께 그의 작업과 관련하여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인간의 한계적 영역에서 부딪히게 되는 욕망에 대하여 비이성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탈합리(脫合理)의 방식으로 그 길을 찾아 나서지만 이를 지극히 합리적 판단의 영역으로 보이는 기록물의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이성과 비이성의 접점을 만들 뿐만 아니라 이성과 비이성의 전 체계를 통하여 자연과 초자연적 지평이 만나는 곳에서 인간의 실체에 접근해 보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인데, 이러한 일련의 작업 방식과 작가적 시도는 인간과 예술에 대한 조망의 틀과 경계 지점을 한층 더 넓히고 확장하게 만든다는 면에서 평가할 부분이 있다고 판단한다.

신재은 작가는 근래 들어 독특한 개념을 주제로 하여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전시에서는 “호황 프로젝트”였다. 국가적으로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상황에서 누구든지 솔깃해지는 문구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 캠페인이나 경제단체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부적이라는 주술적 코드가 강하게 담긴 상징물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내면 상황과 현실의 변화 과정을 어떠한 의견 제시 없이 물리적 기록을 통하여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의 작업에는 사진과 영상이라는 매체에 의해 마치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만들 듯 관조적 시각으로 냉정하게 기록하였었다.

그런데 “애정운 상승 프로젝트”라는 이번 전시는 한 걸음 더 인간 내면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것 같다. 애정이라 함은 지극히 주관적인 내면의 상황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부적을 사용하게 되어 일상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석하고 믿으며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객관적일 수 없는 개인의 판단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스스로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주술 도구를 동양의 풍수 이론을 통해 손수 제작하고 그것을 체험하며 실제 일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SNS의 데이터와 일지와 같은 문서기록으로 남긴다. 그가 최남단 마라도와 최북단의 통일전망대를 찾아가서 부적을 사용하고 그것을 자신의 침대 밑에 두어 그 효험이 일어나도록 실천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이미 주술적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를 다큐멘터리 감독처럼 사진과 영상물로 기록하거나 마치 시나리오 작가처럼 글로 남겨내고 있는 점을 보면 그가 단순히 샤머니즘 차원에서 주술적 행위에 심취해서 이러한 행위들을 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 다큐멘터리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와 다른 것은 “애정운 상승”이라는 일정한 목적성을 가지고 정해진 피드백 과정을 기록하고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며 또한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애정 대상과의 우연히 개입된 사실들을 통하여 그것을 행위를 위해 쓰여 지는 시나리오 대본과는 달리 그 역순에 의해 행위들을 시나리오와 같은 기록물로 남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는 우연과 필연, 주관과 객관, 상상과 실제, 주술과 작위가 교차되며 작가와 타자의 상호작용이 만들어 낸 소설(fiction)같은 실상(the real)이 기록물로 남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작가는 특별히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기록물들을 자신이 실제 사용하는 침대를 전시장에 끌어들임으로써 내밀한 자신의 개인사적 애정 사건들을 관음증적 시선의 대상으로 노출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이전의 “호황 프로젝트”가 관조적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거리 두기를 상정한 방식이었다면 이번 “애정운 프로젝트”는 그러한 거리를 두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 내면 상황 안으로 관객의 시선을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절대적인 것, 객관적인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상정해 놓은 관념이며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변덕스러운 것만 존재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의 애정운 상승 부적이 절대적이며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 객관적이라 믿고 싶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시각적 말걸기를 통해 자신이 ‘인간’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신적 존재든, 애정의 대상이든 자신의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 당신들의 일상에서도 그러하냐는 것이다. 금기와 욕망, 호기심과 불신, 낙관과 비관의 경계에 서성이며 좌충우돌하게 되는 내면의 파동들을 당신들도 인간으로서 호흡처럼 똑같이 느끼게 되느냐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내면의 물음들을 자신의 은밀한 침대 속으로 초청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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