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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xis

-Works on the Resistance against External Situations

 

작업 행위

-외부 상황에 저항하는 작업

 

 

 

Künstler : Choi, Jin-youn (최진연 / 崔鎭㳙)

 

 

 

 

작업의 순기능은 기존 상황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시스템의 폭을 넓히고 감흥을 주며 더 풍부한 사고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의 순기능이며 작업을 하는 이유이다. 순기능이란 긍정적인 기능을 말하는 것이며 예술이나 시스템의 그릇된 오류가 가져온 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본인이 작업 행위에서 느꼈던 생각, 의미, 의도, 과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전시의 목적으로 두기 때문에 단순히 정제된 결과물을 발표하는 것이 아닌, 과정 중에 일어난 여러 가지 변수들과 그에 따른 파생물을 날 것의 상태로 노출시킨다.

본인은 특정 그룹에 맞춰진 시스템이 타 계층을 기만하는 상황에 주목하고 있으며, 예술의 순기능을 드러내기 위해 원초적인 근력을 사용한다. 사회의 기만적 시스템이 인간 이성의 결과로 구축된 폐단이라 여김으로, 이성적 인간 위치가 아닌 원초적 동물의 위치에서 이러한 불편한 상황을 고발하려는 것이다.

불편하고 의문점이 생기는 것들의 예를 들어 보면, 기능의 향상이 없는 상태로 외관만 변형해 소비자 앞에 소개되는 제품들처럼 기업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사회 경제 시스템, 행정 정책에 의해 오히려 훼손되는 정치 행정 시스템, 믿음으로 진리를 강요하는 종교 시스템이다. 예를 든 시스템을 외부 상황이라 정의하고 질문을 한다.

 

작업의 시작

 

사회의 구성원으로 사회 경제 시스템, 정치 행정 시스템, 종교 시스템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들 중 불편함을 주는 것들에 의문을 품었고, 이것이 작업으로 연결되었다. 수많은 외부의 상황들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왔던 것은 사회 경제 시스템이었다. 자본화에 의한 제품과 기업, 경영 법칙 들의 요소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모호하게 전달되었던 불편함의 근원을 파고들었으며, 작업에 있어서 표현 방식과 전시의 방식도 고의적으로 기존 미술 시스템에서 통용되는 갤러리라는 상투적인 발표 공간을 뛰쳐나와 기업의 쇼룸을 선택하기도 했다. 미술이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소비되는 시스템조차도 부정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미술 작업은 사회 경제 개념에 있어 비생산적이고 장식적인 잉여의 산물이지만 사회는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순위로 경쟁을 유도하고 그 정해진 시스템 내에서 서로를 이기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주관적 해석과 주관적 상황들을 담고 있는 미술에서의 경쟁은 그 끝이 순위로 마무리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사회를 전복하고 변화시키고 싶은 반항심이 자리 잡았으며 디지털카메라, mp3(MPEG-1 Audio Layer-3 오디오용 데이터를 저장한 컴퓨터 파일) 플레이어, PMP(Portable Multimedia Player / 휴대용 멀티미디어 재생장치), 랩톱 컴퓨터(Laptop Computer, 문화어: 무릎형 컴퓨터,  휴대형  컴퓨터) 등 신개념 공산화 제품의 홍수 속에서 그즈음 부의 척도가 되는 자동차에 대한 관심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성인의 나이에 독립적인 경제 활동으로 가지지 못하는 고가의  제품이지만  소유하고 싶은 채우지 못하는 욕심이 작업으로 연결됐다. 마치 돈키호테가 거대 풍차를 향해 돌진하듯 다소 무모하게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무모한 시작은 두려움이 없이 자신감에 넘쳐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을 거 같았다. 작업 행위가 지속되고 고민할수록 사회 속 시스템들 속에서 전달되는 불편한 감정들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 사회 경제 시스템에서 전달되는 불편한 감정들

 

사회 경제 시스템에 있어서 노동 행위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노동 행위가 이끌어 내는 여러 가지 결과물들이 사회를 보기 싫게 만드는 것에 이용되고 있으며 그 결과물들은 우리를 소외시킨다. 기득권을 위한 경제 활동, 점점 더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 자본화 사회의 계층화, 기업들의 소비자 기만행위, 그 불편한 것들이 본인을 건드려 작업으로 표출된 것이다. 대상에 대하여 대척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반항이라고 본다면 본인의 작업은 대상을 누르고 붕괴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반항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불편한 감정들 만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불편한 감정에 대한 정체가 궁금해지고, 그 궁금증에 질문을 하면 할수록 사회 경제 시스템의 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면 위에 드러난 부분이 아닌 그 아래 숨겨진 부분들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자본화가 될수록 소수 계층을 위해 특정 그룹에 맞춰진 시스템이 타 계층을 기만하는 상황이 보였는데 그 소수 계층에는 몇몇 공산화 제품과 기업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상업적인 세상은 당장 무엇을 하고, 물건을 구매하고, 돈을 쓰라고 강하게 유혹한다. 이를 위해 기업은 온갖 전략을 동원한다. 우리는 이윤을 추구하는 전략에 대부분 넘어가고 만다.

1우리가 쇼핑할 때는 합리적으로 의식적인 상태에서 구매하기보다 뇌가 무의식의 상태에서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상품을 보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 현재 소유한 물건은 망가졌고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그 상품이 있으면 자신이 더 일을 잘할 수 있다 등의 여러 가지 합리화가 일어나면서, 의식이 하고자 하는 소비를 점차 합리화시켜준다. 이처럼 무의식적인 작동을 겨냥한 것이 우리가 소비하게 하는 마케팅이다. 우리의 뇌는 브랜드를 통해 세상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브랜드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브랜드는 뇌의 깊숙한 부분 즉, 편도(Amygdala-대뇌변연계의 감정조절을 담당)에 저장된다. 편도는 감정을 관할하는데 강력한 브랜드가 되려면 우리의 감정 영역에 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 편도가 반응할 때 과소비가 발생한다. 편도에 자리 잡은 브랜드를 보면 우리는 소비 자동모드로 전환된다. 그러면 무의식적으로 구매 결정을 하게 된다. 쇼핑은 사실 감정인 것이다. 우리가 그걸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 결국 지배하는 것은 감정이다. 사람들의 감정을 사로잡아 물건을 파는 감정 마케팅은 사실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이 외에도 자존감, 외로움, 슬픔, 화 나는 감정들도 이용한다.

2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보면 제일 먼저 다루고 있는 것이 상품이다. 상품은 인간이 생산하고 사용하는 모든 물건을 말한다. 쓸모가 있는 것을 따지는 ‘사용가치’, 교환할 수 있는가를 따지는 ‘교환가치’ 둘 다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했다.(상품=사용가치+교환가치) 이러한 상품은 노동을 통해 생산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상품의 가치는 생산하는데 들어간 평균 노동시간으로 결정된다.(상품가치=상품 생산에 들어간 평균 노동시간) 6시간 동안 6켤레의 신발을 만든다면 신발의 가치는 1 노동시간이라는 것이다. 또 화폐를 상품의 가치를 표시하는 수단으로 보았다. 돈이면 모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화폐 신성화를 경고했으며, 노동이 최고의 가치라고 했다. 자본론을 쓴 주요 목적은 왜 쉬지 않고 열심히 일 하는 노동자들은 항상 가난할까, 반대로 놀고먹는 자본가들은 왜 점점 더  부자가 될까, 하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그 해답을 이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냄으로써 찾아냈다. 자본론 1권은 어떻게 자본이 이윤을 남기는가에 대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시간이나 노동일수를 늘리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원리에 대해 설명했다. 예를 들어 빵공장에서 빵 한 개를 만드는데 얼마만큼의 노동시간이 들어갈지 계산해보자. 먼저 밀가루 1kg을 1 노동시간이라고 가정해본다. 기계는 빵 10,000개를 만들면 수명이 다한다고 하자.(기계=1 노동시간) 그럼 1개를 만드는 데는 1 노동시간이 든다. 물론 노동력도 1 노동시간이 든다고 치면 빵 한 개를 만드는 데는 모두 3 노동시간이 든다. 만약 1 노동시간을 화폐로 환산해서 1,000원이라고 하면 빵 한 개는 3,000원이 된다. 노동자가 1일 8시간을 일하면 24 노동시간이 나오고 그동안 만든 빵 8개의 가치는 24,000원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기계나 원료는 그 가치가 그대로 인정됐는데 노동자는 8시간을 일했는데 자본가는 일당으로 3,000원 만을 준다. 그럼 나머지 5 노동시간은 자본가의 이윤이 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남은 가치를 잉여가치라고 했다. 그런데도 왜 노동자들은 일하기 싫다고 못할까? 자본가가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아는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자에게 더 오래 일하게 한다. 물론 일당은 절대 더 주지 않는다. 결국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자본가는 더 많은 부를 얻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노동시간의 연장으로 생기는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자본가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노동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노동자가 직접 손으로 빵 3개를 만들 때  필요한 노동시간은 3시간 기계를 쓸 때는 1시간, 이는 결국 필요 노동 시간은 줄고 잉여 노동시간이 늘어나는 것. 노동자의 임금은 날로 싸지고 자본가는 그만큼 이윤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생긴 이윤을 상대적 잉여가치(필요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잉여 노동시간이 늘어나 생 기는 잉여가치)라 정의했다.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 기업들은 우리의 모든 부분을 이용하고 자본가들의 이기심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결국 소수의 자본가들을 위해 시장구조가 형성되고 변해가고 우리는 현실에서 비참해진다.

단적으로 타 계층을 기만하는 공산화 제품의 예시는 자동차의 업그레이드다. 특별한 성능의 개선이 없이 가격을 올리기 위한 기만행위였다. 자동차의 예시처럼 경제 시스템에서 노동에 의하여 수많은 생산물이 나오지만 그 결과물들은 제품의 본질적 생산을 넘어 그 이면에는 기업의 배를 불리기 위한 부분이다. 업그레이드를 주장하는 상품은 광고를 하는데 광고로 우리에게 자신을 상상하게 만들고 이것은 구매로 연결된다. 이런 부분은 아이들에게까지 적용되는데 쇼핑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캐릭터 상품들,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티브이 광고들을 끊임없이 반복해 보는 우리 아이들은 매일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어야 한다. 이렇게 시작된 쇼핑은 아이들에게 아주 특별한 기억을 가지게 한다. 자신들도 모르게 그 상품을 좋아하게 만들어 특정한 상품을 선호하는 취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미래의 잠재적인 고객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넘치도록 쏟아져 나오는 상품에 24시간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마케팅의 공격에 우리는 너무 쉽게 무너진다. 그저 잘 쓰는 것이 자랑이라 생각해 왔고 소비의 모습을 통해 자신 안에 감춰진 여러 감정들과 만난다. 들어내고 싶지 않아 화려한 물건으로 포장했던 아픈 감정들. 소비자를 이윤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정치 행정 정치 시스템에서 전달되는 불편한 감정들

 

사회 시스템을 구성하고 가장 자주 직면하는 것은 정치 행정 시스템이다. 정치 행정 시스템은 우리 삶의 질을 향상하고 편의와 번영을 위해야 존재하는 것임에도 때로는 우리들의 삶을 불편하게 함과 동시에 삶의 질을 떨어트리고 저해하는 요소로 자리 잡은 부분들이 있다.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고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해야 할 정치 행정 시스템의 역기능이 본인에게 보인 것이다. 단적인 예로 행정적인 측면에서 나무의 생태는 고려되지 않은 간벌<間伐>이 진행된다. 시스템에 의해 잘려나가는 것이다. 이는 생태 환경에 뿐만 아니라 때 론 정치 행정 시스템에 의해 사람들이 동원되어 노동을 하기도 한다. 이 단적인 예로 30년 전쟁(1618 ∼ 1648년 독일을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 실상은 보헤미아 왕좌 쟁탈 전쟁)과 식민지 전쟁 같은  무의미한 전쟁, 국방의 의무로 저인금으로 동원되는 병역, 간척사업의 명분으로 행해진 서산 개척단, 선감원,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과 같은 정치 행정 시스템, 새마을 운동과 같은 경제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 노동 동원, 나무 심기 운동, 쓰레기 줍기 운동 등 사회적인 제도권 운동에 의한 노동력 착취이다.

권력을 쥐고 있는 자가 방향을 제시하고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이 제도권의 운동이다. 위의 단적인 예시는 노동 행위 자체가 정치 시스템에 의해 엉뚱한 방향으로 쓰이고 풀려나는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처럼 정치 사회적 노동은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결과를 도출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 이런 사회 시스템 내에서 노동은 행정적 측면에서 간벌<間伐>, 사회운동, 전쟁과 같은 결과물들로 도출되는데 이 과정에서 정치 행정 시스템만을 생각하고 처리되는 것들이 불편하고 이상했기에 정치 행정 시스템에 대한 질문과 의심이 들었다. 과연 노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본질적인 의미를 파헤치고 이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져오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증폭되었다.

정치 시스템과 경제 시스템이 결합해서 우리에게 편리함을 줄 것처럼 접근해 있는 시스템이 은행이다. 정부는 정부 은행으로부터 민간은행에 대출해주고 돈을 불린다. 이 과정에 파생 상품에 의한 상황들을 때로는 숨기고 있다.

31925년 러시아의 경제학자 니콜라이 콘드라예프(Nikolai Dmitrievich Kondraties / 1892-1938)는 자본주의 경제 환경에서는 장기순환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주기가 48년에서 60년 정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금세기의 대표적인 경제학자 중의 한 명인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슘페터(Schumpeter, Jaseph alois / 1883-1950) 역시 자본주의 경제는 물결처럼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콘드라티예프 파동이라 했다.

미국의 콘드라예프 주기는 2000년부터 시작되었다. 2007년부터 시작한 급격한 이자율 하락은 디플레이션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금융회사들은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돈을 대출해주었다. 바로 모기지다. 바로 그것으로 집을 사고 차를 샀다. 빌릴 수 있는 다 빌렸고 빌려서는 안 되는 사람까지도 다 빌렸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이 추락하니까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금융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상황은 비슷하다. 우리의 아버지 세대들은 집 값은 항상 오르는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콘드라예프 주기에 여름에 살았기 때문이다. 2010년 기준으로 우리는 이제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금융위기는 왜 일어나고 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가? 왜 부동산 가격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가? 왜 젊은 사람들이 취직을 못하는지 알 수 있다. 갚아도 갚아도 없어지지 않는 빚, 우리는 결코 갚을 수 없는 부채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기에 희생자는 힘없는 우리들 중에 누구이다. 이건 민주주의 시스템이 아니다. 은행가를 위한, 은행가에 의한 민간은행 시스템이다.

 

 

  • 외부 상황들에 대한 반항

 

사회의 시스템은 본인을 포함하여 성인이 되는 이들을 길들인다. 현 사회 경제적으로 볼 때 한 사람이 사회로 진출하는 순간에 경제적으로 독립적 이어야 하며 경제 생산적 직업을 택하게 한다. 생존을 위해 경제적 노동을 강요받는 것이다. 본인도 사회에 진출했고 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자본 만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 내 등을 짓누르고 사고를 지배 하기 시작했다. 경제 생산적 노동을 강요받으며 그것으로부터 벋어 나지 못했다. 국가를 위한 노동 또한 강요받게 된다. 그래서 나는 도대체 내가 왜 이것 때문에 힘들어하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이 모든 시스템에 대한 나의 시각화를 바꿔 보기 시작했다.

미술 작업을 하는 성인의 경우 사회 진출의 순간에 경제적 독립에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 비생산적 가치를 추구하는 노동을 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트렌드하고 상업적 판단 기준에 의해 상품으로 인식될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도 있으며 비생산성 노동에 의한 잉여물이 감성을 움직이기에 사회의 일부는 가치가 있는 일로 취급한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미술을 바라보는 다중의 시선은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비생산적이고 잉여물로 본다. ‘내 노동의 값은 얼마인가?’, ‘내 국방의 의무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가 정한 부의 가치, 목표의 끝은 어디인가?’, ‘사회 직급의 만족도는 어느 직급이 끝인 것인가?’, ‘지식의 적립은 어느 부분까지 축적해야 만족감이 오는 것인가?’, ‘나의 예술은 돈으로 팔리는 작품이 돼야 하는가?’ 등의 질문들을 가지게 되고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가설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우리가 정한 부의 가치에 있어서 부의 목표를 정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자본주의의 계급이 생겨난다.

자본은 또 다른 자본화를 만들어 파생적으로 편법과 과한 욕심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사회 직급의 만족도는 우리 사회가 임의로 정한 상류층으로 진입하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상류층은 어디서부터 인가, 계층을 자본의 개념으로 나누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자본이 사회의 방향성을 모호하게 하며 길을 잃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지식의 적립은 지식을 쌓음에 만족도는 없지만 학벌이라는 하나의 표출 방법으로 학위에 갈증 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사회의 인식에 의해 학위가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닐까, 고생해서 만들어지는 작품들이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누군가는 봐주는 것일까 라는 질문들로 모든 외부 상황은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그 끝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우리를 달리게 하는 것에 대한 대척된 질문들을 만들었고 동시에 사회 시스템들이 이성 기준들에 대하여 불편한 감정들에 대한 질문이 생겼다. 그 질문들에  집중하고 집착한 하나의 방향이 사회 경제적 역할 수행 거부이다. 역할 수행의 거부라는 목적으로 의미 없는 노동 행위로 시스템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없다면 체계는 흔들지도 변하지도 않는다고 보았다. 경제  시스템에서 노동에 의해서 많은 생산물이 나오지만 그 생산물은 발전된 형태로만 보이진 않는다. 정치 행정 시스템 내에서도 많은 인력과 노동이 동원되고 많은 노동에 의해 무언가 만들어지는데 도출된 결과물들이 전쟁이다. 두 가지 시스템은 우리의 행복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결과가 도출되지 않는다. 경제는 점점 그 생산품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소외시키고 불행하게 한다. 정치는 우리를 전쟁에 휘말리게 하고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아 간다. 사회 시스템이 견고해질수록 특정 계급을 제외하고 사회 대부분이 가지지 못하게 된다.

 

 

  • 경제적으로 주어진 역할 수행 거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면서 시스템에 의해 사회 경제적 노동으로 독립할 수 있는 직업을 위한 교육에 줄을 서있다. 경제적 역할의 거부 방법은 직업 교육에서 벗어나 있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집착하는 행위였다. 그 질문 중 하나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제품들을 비교하고 살펴보는 행위였다. 그 자본화의 정점에 있는 하나의 제품을 유심히 바라보고 그 제품에 또다시 질문하며 집착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수요는 공급과 같아야 하지만 우리는 잉여 제품을 생산하고 그 제품을 판매하여 이득을 취하기 위해 사입을 조장한다. 원시시대에서 자신들이 필요한 물품을 구하고 물물교환을 하는 현상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다. 수요가 공급과 이항<二項>할 때 제품은 그 기능이나 브랜드의 가치, 이미지를 강조하며 거짓 혹은 과장되어 소비자에게 다가오는데 이런 현상은 다중을 현옥 시키고 소비를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속에서 자신을 들어내고 과시하여 신개념의 특정 계층에 편승하기 위한 소비의 형태로 부를 과시하고 그 부는 사회 속에서 무언의 계급을 형성한다. 계급은 많은 자본을 가진 자가 상류층이 되고 그 부가 권력이 되는 아이러니를 만든다. 과시에 대하여, 제품에 대하여 등 시스템에 대한 질문은 지속됐고 질문에 아무도 답해 주지 않았다. 질문과 의문이 증폭되며 작업 행위는 시작되었다.

 

 

  • 작업에 있어서 노동의 개념

 

작업자는 타인에게 본인의 과정과 의도, 의미, 생각, 결과물 들을 전달하고 공유하기 위해 전시라는 매개체를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도 수많은 정신적, 근력, 시간의 노동은 들어간다. 그럼과 동시에 사회의 타 시스템들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방향과 부정적인 방향을 만들어 낸다. 결과적으로 예술이 가지는 본질이나 본래의 의미보다는 사회가 원하고 다중이 이해하며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결과물적 방향이 잠식되어 가고 있는 것이며 행정화 되고 있다. 사회 속에서의 노동은 생존을 위해 지속되고 자본화 과정에서 잉여 생산물을 만들었으며 가치가 발생하였다. 미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잉여 가치가 올라가고 그 시스템에 순응하며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노동만을 행하는 것으로 변형된 것이다. 노동은 생존하기 위함이고 창조적인 행위이다.

4노동을 함으로써 노동의 대상에 인간의 생각이나 의미, 나아가 사상을 구체화시켜 무언가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 우리들은 노동을 하면서 내가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기쁨을 때때로 느낀다. 이것은 결국 우리들 각자의 존재 의의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분명히 작업에 있어서 노동은 시스템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기쁨이 전달되고 이를 통해 살아 있고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본인을 포함한 작업자들이 금전을 만들기 위해 결과물만을 만든다면 다중에게 작업의 과정과 의미는 전달되지 않고 예술의 순기능은 소멸된다. 그렇다면 예술은 다양성과 실험성은 상실하고 획일화되고 사회 경제 시스템에 의해 상품화에만 매달리고 결과물만 소비되고 예술은 상실된다. 이것은 감성을 배제당하며 합리적 의심과 공감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감성이 배제되고 예술의 의미와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은 시스템화의 길로 접어든다고 생각했다. 작업의 노동적 측면에 질문을 할수록 더 많은 질문이 생겨났고 이 모든 것들이 시스템화 되는 것에 있다고 여겨졌다. 본인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견고하게 보인다. 이 견고함이 축적되고 유지되는 부분에도 노동이 결합되어 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견고하게 유지된다. 내 근본적인 질문은 본인이 느끼는 불편함은 인간의 노동행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본인은 목적 있는 행위, 노동이 이러한 결과물들을 가져왔다고 질문하게 되고 노동 행위에 집중해서 질문하게 되었다.

 

 

Hammering

일련의 작업 행위와 시스템에 있어서 실행, 실천하면서 작업의 결과적 측면보다는 작업을 행하는 사람의 작업 행위에 보다 집중하게 되면서 생산적 노동에 대한 개념을 비틀어 생각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정 시간의 노동력을 오브제에 행하게 되었다. 이 작업이 ‘Hammering’ 작업이다. 노동을 통해 나타나는 물리적 변화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노동과 그 가치에 대하여 무엇을 향해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본인은 예술 속에서 행하는 노동 행위에 집착하고 균일한 시간과 노동을 결합하여 오브제와 지속적 마찰을 일으키고 노동 행위를 한다. 반복적인 비생산적 노동으로 저항하고 그 저항을 통해 만족감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사회가 원하는 경제적 노동에서 반대되는 작업 행위로 우리가 추구하고 살아가는 측면을 돌아보고 사회와 미술에 저항하고 있다. 경제 기본 개념의 하나는 생산 = 공급으로 시작한다. 공급을 위해서는 생산을 위한 노동을 해야 하고 이 노동은 자본을 만들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이러한 경제 기본 개념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예술의 노동은 공급을 위하거나 자본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노동은 생존과 쾌락을 위한 수단인데 본인은 쾌락을 위한 노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슬레지해머로 오브제에 물리적 행위를 가하는 것, 정해진 공간에 페인트를 지속적으로 칠하는 것, 페인트를 일정한 공간에 붇는 행위 등 작업 행위가 그것들인데 이는 결과물이 아닌 행위에 목적이 배제된 것들이다. 이를 통해 목적 없는 노동으로 질문을 하고 있다. ’Hammering’ 작업에서는 기존의 작업에서보다 작업의 행위를 더욱 강조하고 그 행위에 저항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작업자가 결과물보다 작업 행위에 집착하는 것은 행위의 방법, 행위가 가지는 노동적 측면, 행위가 가지는 의미, 행위를 통한 저항으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 행위의 방법

 

작업에서 시스템을 제외한 행위를 하는데 작업의 방법으로 몸을 쓴다. 몸을 쓰는 행위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달리기, 오래 매달리기, 웨이트 트레이닝과 같은 운동이 아닌 노동의 방식을 취하는데 노동은 사회 내에서 생존의 필수로 자본주의, 행정, 종교들의 시스템에서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을 말한다. 사회의 시스템을 말하기 위해 노동의 형태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번 ’Hammering’은 노동의 행위를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 목적이 없다. 시스템 내에서 이성적인 판단에 가두는 압박에 벗어나기 위해 육체적 노동 행위를 이용한다.

또한 파괴성의 과정이 강조된 작업이다. 파괴성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파괴되는 과정의 행위가 중시되는 작업이다.

도구로 슬레지해머라는 둔탁한 도구를 사용하고 있으며 오브제는 형상을 가지지 않은 조형 재료들을 선택하여 작업 행위에 집중시켰다.

보통 슬레지해머는 공사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건축 구조물을 파괴하기 위해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본인에게는 파괴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 행위가 가지는 노동적인 측면

 

몸을 쓰는 노동은 과거에 생존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우리는 동물이기에 본래 몸을 쓰도록 디자인되었다. 몸을 쓰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행동인데 현대인에게 몸을 쓰는 행위는 과거의 산물로 저평가되어 사회적으로 고상함과 고급문화의 반대에 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육체적 노동은 가치가 하락해 있는 것이다. 노동의 측면에서 몸을 쓰는 행위가 사회의 하위계층으로 전락했고, 이상적으로 짜인 우리를 농락하는 시스템의 정반대에 놓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본인은 저항하고자 하는 시스템에 육체적인 노동행위가 강력한 무기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것이 시스템에 대한 강한 저항의 형태로 보았다.

5가치란 무엇인가? 가치(값어치)는 물론 경제적 가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얼마만큼 중요한가, 의미가 있는가, 소망스러운가, 그것이 없으면 곤란한가 등등에 의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갖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는 가지각색의 가치가 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진. 선. 미라는 세 가지 가치를 중심 되는 가치로 삼는 가르침을 받아 왔다. 그 위에, 성스러운 것이라든가 이로운 것 등의 가치가 추가되었다.

어떤 소녀에게는 인형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일 터이고, 어떤 청년에게는 수영에서 훌륭한 기록을 내는 일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며, 따라서 그에게는 수영이 가장 가치가 있을 것이다. 또한 자기의 돈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증식시키는 일만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과학자의 진리라는 가치, 예술가나 예술 애호가의 미적 가치 등, 이러한 것들은 각기 가지각색의 것이어서 획일적으로 객관적인 평가. 평량이 불가능하다. 경제적인 재화의 경우에도 각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평가가 가지각색이다. 시계를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시계를 별로 탐내지 않지만, 현재 시계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시계는 매우 가치가 높은 것이다. 음식물이나 의복 등에 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각자에 따라 사용가치나 효용가치는 완전히 주관적인 것이다.

노동의 의미에 대하여 ‘노동의 의미’ 책에서는 위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 행위가 가지는 의미

 

작업을 통해 가장 우선 다가오는 부분은 파괴다. 파괴는 본인에게 희열을 준다. 시각적 즐거움과 근육의 즐거움이 동시에 충족되는데 시각적 측면에서는 거칠고 투박함이 미적 핵심 요소다. 파괴의 작업 과정으로 인하여 근육의 움직임이 대뇌에 전달될 때의 즐거움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동시에 시스템들이 주는 불편한 감정들의 질문을 작업으로 표출한다. 도로<徒勞>(헛되이 수고함)에서 노동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본인이 느낀 노동의 즐거움은 본인이 느낌과 타인은 다르다. 본인이 느낀 감정과 결과는 타인의 작업과 분명히 다른 과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작업 행위에서 느낀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설령 시대를 담고 있는 것이 이전의 미술 사조의 작업과 같은 맥락이라 하더라도 작업은 수행할 가치를 가지고 있다.

 

 

  • 행위를 통한 저항

 

본인은 사회의 부분적인 모순점에 대하여 질문하고 작업으로 수행하였다.  ‘Hammering’ 작업을 통해 고상한 현대 사회문화에 대한 저항정신과 현재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자본을 가진 자들의 욕심에 의해 만들어지는 노동 생산품이 우리를 소외시키고 비참하게 하며 외롭게 만드는 사회 경제 시스템, 우리의 생태는 무시되고 행해지는 행정 시스템, 권력을 쥐고 있는 자가 방향을 제시하고 그 방향으로 몰아가는 제도권 운동,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 시스템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

예술은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상을 담고 있는데 플러서스 운동도 그중 하나의 사조이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인 플럭서스 운동은 그 당시에 팽창하는 서양 기계문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실험해보고 긍정하겠다는 태도이다. 하지만 본인의 작업은 예술가가 미술 작업 행위의 노동을 한다 하여도 그 노동의 대가에 보답이 없다고 말하기에 플럭서스의 해프닝이나 퍼포먼스 측면만을 차용하여 작업 행위를 하고 있다. 피아노를 부수고, 넥타이를 자르고, 4분 30초 동안 공연장에 연주를 하지 않으며 소리를 만드는 작업의 방법적인 부분에서 작업의 방법적인 측면에서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플럭서스 운동과 방법적 측면에서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 본인도 예술의 외형을 무한정으로 넓히고자 한다. 그러나 본인의 작업은 추구하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들이 다르다. hammering 작업은 결과 없이 끝없는 반복 노동의 허무함, 공허함을 내포하고 있다. 일상 속 허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허무의 보편적인 대안이 없는 부정을 말하고 있다. “이건 아니다”라고 부정할 때는 그 부정의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부정에 대한 대안이 없는 상태의 허무를 담고 있다.

본인은 hammering 작업으로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 가치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온 생활상의 가치, 즉 이상이나 도덕규범이나 문화, 생활양식 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견해의 입장에 따른 생활태도 등을 총칭하는 니힐리즘을 담고 있는데 사회의 진보란 모든 사회적 제도를 해소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도 내포하고 있다.

현재의 작업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이번 ‘Hammering’ 작업을 통해 노동에 대한 순수한 몸을 사용하는 쾌감을 전달받았다. 작업에 있어 본인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상황들에 대한 사회 경제시스템, 정치 행정 시스템, 종교 시스템에 대하여 불편함 감정을 느꼈고 이에 대한 그 불편함에 대한 정체들을 생각하였으며 왜 그것들이 불편한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만들어졌다. 왜 이런 작업들로 표출되었는지를 고민하면서 공통적으로 노동에 대한 호기심을 발견하였고 순수하게 단순화시켜 행위 자체에만 집중한 결과 hammering 작업을 통해 어떤 의미와 시스템도 없었지만 이 단순한 행위 자체가 본인에게 쾌감으로 전달되었다. 작업 행위에서 오는 쾌감은 진정한 의미의 저항을 느끼기 때문에 그 저항에 대한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작업 행위에서 목적이 없는 순간을 보았을 때,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쾌락이 극대화된다. 그 행위가 쓸데없는 행위라는 것을 알았기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이 단순한 작업 행위가 주는 쾌감으로 현재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hammering의 연계 작업으로 painting 작업이 병행되고 있는데 이 작업도 행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작업의 과정

Painting

 

우리는 미술사적으로 페인팅이라 하면 하나의 기법으로 치부한다. 이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페인트 칠 하는 행위를 하는데 이는 그리는 행위에서 정신적 노동을 배제하고 근육의 노동 측면으로만 바라본 것이다. ‘Painting’ 작업은 ‘Hammering’ 작업에서 더욱더 목적이 없는 노동에 집중함과 동시에 반복성을 추가하였다. 같은 노동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과정은 노동의 반복적 행위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다른 것을 지우거나 그리기 위 한 행위를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행위로 본인이 느낄 수 있는 작업 행위의 즐거움을 더욱 극대화된다.

‘Hammering’, ‘Painting’ 작업은 지속적인 질문에 집착하며 행한 작업이다. 이 질 문 중 하나가 ’ELEMENT’ 작업이다. 이 작업은 사회 경제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시스템에 저항하기 위한 표출이었다. ’ELEMENT’ 작업에서 자동차는 스테이터스 심벌(status symbol : 사회적 지위·신분·계급의 표징<sign, 標徵>이란 것)을 표출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내면이 적극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기능은 개선되지 않은 채로 낯선 외형으로 변형하여 사람들에게 판매되는 것이다. 하지만 낯선 외형과 거짓, 과정에도 브랜드의 이미지를 구매하고 자신의 위치를 대변한다고 판단한다. 그것을 부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만들어진 욕망의 시스템에서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 보았다. 기존의 전시장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질문에 접근해 보았다. 그 질문의 다양한 방식으로 답변이 올 것으로 예상했다.

이 작업을 통해 사회 경제 시스템의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사람들이 정해진 사회 시스템 내에서 과도한 노동을 하게 되는데 우리의 사람을 유지하고 생존 생활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누군가의 배를 불려주기 위한 잉여 가치물을 생산하는 것, 거짓과 과정으로 기만하는 점에 대하여 질문했다. 그 잉여 가치가 올바른 곳으로 흘러간 것이 아니라 과도한 포장이나 과도한 선전이 되거나 거짓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본인이 느낀 이 불편한 감정은 기업들을 잇속을 차리기 위해 불편 한 감정을 전달하고 그러한 제품을 만드는 부분이 작업으로 연결되었다.

‘ELEMENT’ 작업은 기능의 변화가 없이 점점 상승하는 금액의 제품을 과정과 거짓으로 판매하는 행태가 과연 업그레이드 인가로 시작되었고 지속적 질문을 했다. 작업의 형식은 한 가지 작업 결과물로 반복적 전시보다는 ‘Crumple ; Hyundai-motors’, ‘Element_ part2’,  ‘ELEMENT  ; miniature’ 시리즈,  ‘Slice’, ’ELEMENT ; idea  Sketch’ 작업들로 외형의 다양한 변형과 방향성을 찾았고 지속적으로 외형의 변화만을 모색하였다. 공간적 측면에서도 기성의 미술 전시장의 탈피가 아닌 미술계로 진입을 여러 방면으로 모색하면서 방법적인 측면에서 결과물의 새로움만 추구하고 행위와 저항, 의미가 변질됨을 느꼈다.

하지만 ‘ELEMENT’ 시리즈 작업을 통해 작업이 가지는 비생산성 노동과 결과물의 비 자본화에 대한 고민을 지속하게 되었다. 생존과 생산을 위해 행해지는 노동은 미술 작업을 통해 사회적 경제 생산성에서 벗어나 있는데 작업의 방향성이 사회에서 정하는 규제나 규범을 비틀어 저항하는 행위 자체로 변형된 것이다. 사회 시스템에서 찾는 학연, 지연을 이용하고 작업 전시를 위한 기획서를 만들어내고 마치 경제적으로 가치를 생산할 것만 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더 많은 금전적 이득, 더 큰 가치, 희소성에 대한 갈망, 스테이터스 심벌, 상실한 기업정신, 기업들의 과장과 거짓, 예술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비생산성 노동이라는 현시대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

조형 작업자들에게 나무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다. 본인 역시 나무와 친숙하다. 하지만  본인은 단순한 재료로 바라보지 않고 재료의 생성 과정과 정치 행정적 절차에 주목하였다. 나무는 일정기간 지나면 간벌 대상이 되는데 이 작업에서는 간벌<間伐> 대상 지역의 나무를 잘라 오는 작업을 수행하고 결과 오브제를 전시장에 나열하였는데 정치 행정 시스템에 있어 나무를 자르는 행위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풍자했다.

이 작업 과정에서 정치 행정 시스템은 우리들에게도 적용하는 것 같았다. 사회 시스템 속에서 사람도 일정기간 되면서부터 사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 현실에서는 퇴직을 권고받는 현상이 현시대에는 흔한  일이었으며 본인에게는 간벌<間伐>되는 나무와 비슷하다 느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 행정적인 부분이 많이 드러난다. 그 행정적인 절차가 좋든 싫든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절차에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허나 분명히 이런 행정적인 면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범주 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50대가 되는 사람들이 권고받는 퇴직은 어찌 보면 가족과 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노동을 수행해야 하지만 사회 시스템에 의해 새로운 일, 새로운 환경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시스템에 의해 강요되고 수긍해야 하는 부분은 본인에게 불편한 점으로 다가왔다. 고려되지 않고 소비되는 시스템에 질문과 의심이 생긴 것이다.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나무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성장하고 인간을 위해 맹목적으로 바친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 행정 시스템은 사회의 개발, 욕심을 위한 절차에 의해 잘린다. 일정 기간 성장한 후 더 이상 노동을 행할 수 없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이 작업에서 본인은 노동을 행할 수  없게 되는 나무들로 정치 행정적 절차에 의한 파괴적 노동을 행하고 잉여 결과 오브제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였다. 고대로부터 사회가 형성되고 우리는 노동을 강요받으며 살아왔다. 수많은 세기를 거치며 때로는 정치 행정적 상황에 의해 노동을 착취당하고 강요받으며 결과와는 무관하게 이용되기도 했다. 사회 시스템에 의해 제거되고 노동을 행하게 되는 불편한 감정을 본인이 직접 간벌하고 노동하는 나무 작업으로 저항하였다.

 

The fact

 

사회 시스템에는 종교도 있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인간에게  믿음이라는 맹목적인 강요로부터 우리들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을 거세하는데 본인은 종교가 가지는 믿음의 강요, 합리적 의심의 거세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종교론적 관점과 과학적 관점에 있어서 인간과 신의 관계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흔히 믿는 사람은 볼 수 있고 편안해진다고 하는데 그 믿음은 맹목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의심이 없이 믿어야만 한다는 뜻이 되는데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는 인간은 종교 앞에 어떤 존재로 있게 되는가. 로만 가톨릭에서 예수는 여성의 몸을 빌어 잉태되고 그 여성은 성모가 되는데 본래  종교에서는 여성의 지위 상승을 신경 쓰고 있었을까. 불교의 신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인가. 믿음과 진리는 인간에 의해 정해진 시스템은 아닌가 등의 질문이 생겨났다.

그 불편한 한 가지가 로만 가톨릭에 있어서 여성을 대하고 그 여성들을 바라보는 관점의 이 야기이다. 종교에 있어서 특정 인물인 예수의 어머니 성모라고 칭하면서도 그 존재의 실존 여부는 검증되지 않았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역사적  판단에 있어 긍정적 이든 부정적이든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두 인물은 큰 의미에서 어머니를 상징하면서도 정치적 의미도 담고 있는 인물이며 마리아는 역사적으로 민비는 사진상으로 추정되는 인물일 뿐이다. 단지 추정되는 이미지와 로만 가톨릭의 마리아상에 투영하는 영상 작업으로  믿음에 대한 교리, 여성들의 노동,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음성으로 담았다.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회 속에서 여성이기에 받아야 하는 대우와 노동에 강요, 사회 속에서의 대우를 여성으로 하여금 듣고 더 넓게는 우리는에게 신이 노동을 강요한 부분을 의심해 본다면 종교가 가지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 수 있으며 그 합리적 의심이 인간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했다.

Overlaping ; Ver.2018 / F.R.P + video : Closed Circuit, Installation, Sound / variable  installation / 2018

이와 동시에 조계종과 함께 한 작업에서는 불교가 가지는 불편한 질문들을 작업으로 표출하였다. 불교는 자신들이 말하기를 종교라기보다는 수행에 그 의미를 더 두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 수행에도 신이 있고 믿음과 바라보는 관점을 정확히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뚜렷하게 진리를 모두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신의 위치를 넘볼 수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도 엄연히 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신 중 하나가 미륵이다. 세상에 평화가 오고 편안 해지면 그로부터 56만 년 후에 이승으로 내려온다는 미륵, 과연 그 편안한 후에 모든 인간이 득도한 생태의 세상에 미륵이 필요한 것일까 라는 의문과 불편함으로부터 작업을 진행하였다. 불교의 미륵을 디지털 드로잉으로 작업하고 그 드로잉을 기반으로 인터렉티브 사진 이미지 합성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참여하는 관람객들은 자신이 모두 미륵이 될 수 있는 시각화 작업(자신을 찍어 합성되는 결과물은 참여자가 볼 수 없게 만들었고 전시장 중앙에는 ‘有善人視 / 유선인시 : 착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라는 거짓 사자성어로 구성하였다.)은 우리가 마음과 정신적 안식을 위해 찾는 종교가 사실은 믿음이라는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거짓일지 모른다는 점을 비틀고 있다.

‘The  fact’  시리즈는 종교의 강요와 믿음의 강요에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로만 가톨릭의 교리, 조계종 불교의 교리를 접하고 생활을 체험했다. 작업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본인은 종교에 더 깊숙이 침투하여 직접 경험하고 생활하는 작업 행위를 하였다.

질문의 집착으로 시작된 ‘Hammering’과 ‘Painting’ 작업 행위를 지속하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저항정신을 담은 도로<徒勞>(헛되이 수고함)의 행위로 신체적 근력 사용을 작업으로 확장시킬 것이다. 작업의 방향성에 있어서 일정 시간을 정하여 그 일정 시간 동안 작업 행위를 지속하는 방법과 작업의 파괴적 측면을 강조하는 작업, 작업의 결과물과 음향으로 과정을 들어내는 작업으로 다양한 실험과 방향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작업은 거대한 자연환경에 의미 없는 노동 행위를 결합하여 자연 속에 작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질문을 이어갈 것이다.

1「 다큐 프라임 」 , EBS, 2012, 자본주의 2부. 소비는 감정이다, 00:18:45 - 00:19:42

2「 다큐 프라임 」 , EBS, 2012, 자본주의 4부. 세상을 바꾼 위대한 철학들, 00:41:02 - 00:45:48

3 「 다큐 프라임 」 , EBS, 2012, 자본주의 1부. 돈은 빚이다, 00:44:10 - 00:46:50

4 바레, 프랑소아, 「 노동의 역사 」, 광민사, 1979, 3page, 1줄 - 6줄

5 청수 정덕 ( 淸 水 正 德 ) , 「 노동의 의미 」 , 한마당 출판사, 1983, 54page 19줄 - 55page 13줄

참고자료

 

바레, 프랑소아, 「 노동의 역사 」 , 광민사, 1979

청수 정덕( 淸 水 正 德 ) , 「 노동의 의미 」 , 한마당 출판사, 1983

「 다큐 프라임 」 , EBS, 2012,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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